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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종로 지역 지명 유래 (ft.피맛골 지명유래)

by 유용한 각종 정보(여행, IT/모바일, 엑셀 함수 등) 2022.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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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는 서울 속의 서울이다.예로부터 종각이 있어 종소리로서 시각을 알리고, 왕실에 물자를 공급하는 육이전이 자리하여 번성을 누렸던 곳이다. 조선 초부터 종로네거리에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鐘樓)가 세워져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종루십자가·종가·종루·종루가·운종가 등으로 불리었다. 종루가는 종루가 있는 거리를 말하며 오늘날 종로네거리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 초부터 종로네거리에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鐘樓)가 세워져 있었다. 종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모이는 곳이어서 탐관오리를 볼기치던 일을 두고 생겨난 말이 종로결장 (鐘路決杖) 이다.

현재에도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종로 광장시장은 조선시대 배오개시장의 명맥을 잇고, 1905년 광장주식 회사의 설립과 함께 시장 개설 허가를 받아 오랜 전통을 가진 전통시장이다. 다양한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들이 많고, 포목과 구제 상품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구한말에 설립된 광장주식회사의 이름은 과거 청계천에 있던 다리와 관계가 있다. 청계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회사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는 의미에서 다리 이름의 앞 글자를 따 광장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처음에는 광교와 장교의 첫 글자인 광장(廣長)이었지만 훗날 넓게 저장한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한자가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허가한 시전, 서소문 일대에 있던 칠패시장, 흥인지문 일대의 배오개에 있던 배오개시장이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칠패시장과 배오개시장은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맞물려 한양 주변의 누원점, 송파장 등과 연계해 민간 시장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재빠르게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이 서울의 시장을 지배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05년 과거 배오개시장이 있던 곳을 근거지로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이후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종로는 서울의 동서를 잇는 대표적인 간선도로이자 서울의 동맥 구실을 해왔다. 종로는 조선 초 한양천도와 함께 서울의 도시계획 때 중심가로 정해져 가장 넓은 대로였다. 일제에 의해 1912년 11월 6일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에 따라 동대문에서 경희궁 앞까지 이르는 길로 15간 즉 28m로 좁혀 계획되어 1915년에 개수되었고, 1926년에도 개수 되었다. 종로는 1952년 3월 25일 내무부고시 제23호에 의해 폭 40m로 확장하기로 계획되어 1974년 지하철 1호선 공사 때 대부분 넓혀져 오늘에 이른다.

 

 

<종료 피맛골의 지명 유래>

'피맛골'은 서울시 종로구 166번지 일대 종로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말을 피한다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종로를 지나다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하는 고관대작들을 만나면 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이 이런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한길 양쪽 뒤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곤 했고, 행차가 오래 걸리면 이곳에서 요기도 하면서 기다려 음식점 골목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임금이 성균관으로 들어가면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들이 감히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성균관 동쪽이던 이곳에 말을 묶어두고 임금이 나올 때까지 피해 있어 '피맛골'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국어사전에선 다 자란 암말을 '피마', 수말을 '상마'라고 하는데, '피맛골' 유래는 여기서 나왔다기보다 말을 피한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게 서울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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